노동문제에 대한 강연을 끝낼 무렵에 "언젠가는 의사들도 노동조합 깃발 아래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해 온 지 10년이 넘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사람과 비웃는 사람…. 전공의들로 구성된 '대한전공의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병원에 고용된 봉직의들도 '병원의사 유니온'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그 두 가지의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의 생각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봉직의 노조준비위'(가칭) 관계자는 "현재 봉직의는 전문의로서 인정받기보다 또 다른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다"며 "전공의에서 전문의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이 끊기기를 바라는 많은 봉직의들이 '병원의사 유니온'(Hospital Doctor's UnionㆍHODU) 설립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병원의사 유니온'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한 마디 짚고 넘어가자.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노동조합'이란 단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의사들의 정서가 아직 노동조합이란 단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유니온이라는 명칭을 생각했다고 하지만 노동조합의 영문 표기가 바로 유니온(union)이니 이런 '눈 가리고 아웅'도 없다. 영어 잘 모르는 사람만 속아 넘어가라는 뜻이요,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문화적 사대주의다. 의사노조뿐만 아니라 지난 6월에는 우리銀行의 3급 이상 관리직, 즉 銀行 지점장급 이상 직원들만 가입하는 관리직 노조도 설립됐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노동문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웃기는 놈들'이라는 반응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마치 '데자뷰' 현상처럼 계속 되풀이돼 왔다.
전교조가 설립되던 10여 년 전을 돌이켜 보자. 당시의 대통령은 "신성한 교직자가 어떻게 노동자인가? 교사 노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1500여 명의 교사들이 해직당하기도 했지만 전교조는 지금 9만 명의 조합원을 갖춘 큰 조직이 됐다. 자녀들이 명문대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학부형 입장에서는 전교조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학부형들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자녀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사 4명 중 1명이 전교조 조합원인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공무원 노동조합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이 어떻게 노동자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전국의 도청·시청·구청·군청마다 공무원노조가 설립되고 읍·면·동사무소에까지 공무원노동조합 깃발이 세워지는 엄연한 현실을 막을 수는 없다.
길게 보면,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역사 300여 년 동안 계속됐다. 점점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들이 점점 다양한 종류의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신들도 노동자라고 깨닫고 새로운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일이 300여 년 동안 계속됐다는 뜻이다.
외국 정보통신 회사의 한국지사에는 토익(TOEIC) 점수가 거의 만점인 사람들로만 구성된 노동조합도 있고 석·박사 학위 소지자들로 구성된 연구소 노동조합만도 우리 사회에 벌써 수십 개에 이른다. 이런 현상이 어디까지 계속될까? 다른 선진국들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쉽게 알 수 있다. 선진국에는 경찰노조, 변호사노조, 판사노조가 설립돼 있고 장관이나 대사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나라들도 있다. 경찰, 판사, 장관, 대사들도 국가권력과 마주하는 대립구도 속에서는 '사회적 약자'라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우리 사회도 장차 이렇게 변해가는 엄연한 현실을 막을 수는 없다.
'불법행위'라는 잣대로 교사와 공무원들의 노동조합 설립을 막을 수 없었던 경험에 터잡아 앞으로 경찰이나 판사들이 노동조합 깃발 아래 모이는 행위 역시 불법이라고 막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그것이 우리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역사의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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