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유형의 ‘갑질’로 각 분야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의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급기야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는 극단적인 일이 자주 빚어지곤 한다. 고객센터 직원이 열악한 근무환경을 폭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하면 주민의 폭언에 시달리던 경비원이 목숨을 끊은 사건도 있었다. 특히 대전에서도 최근 민원 등에 대한 스트레스로 한 공무원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어찌보면 고객 또는 민원인이 소위 왕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으며 이에 걸맞은 서비스 질을 강조하다 반대급부로 몸집을 키운 스트레스가 우리 이웃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아닌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갑질의 희생양이 된 민망한 사례기는 하나 서비스 질 제고는 우리 사회 전반이 요구받고 있다. 문턱이 높았던 관공서도 지방자치시대의 성장과 함께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혜자 입장에서 성에 차지 않을 수 있지만 분명 행정이 제공하는 서비스 질은 개선되고 있다. 다만 일부지만 ‘누리는 자’들이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글쎄’다. 변화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뿐만 아니라 받는 측에서도 필요한 법이다. ◆공공부문 억지·고질 민원 형태와 대응
현재 공공부문에서 ‘억지민원’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명확하게 합의한 정의는 없다. 정부는 민원인의 반발과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고질(억지) 민원’보다 ‘특이민원’이나 ‘고충민원’으로 칭하고, 처벌도 벌금형에 그치는 등 관대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억지민원’에 대한 정부기관의 시각도 제각각이다. 행정자치부는 ‘정당한 행정처분 등에 승복하지 않고 자기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장시간 반복적인 주장 등으로 행정력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정상적이지 못한 불법 또는 부당한 방법으로 민원을 제기해 정당한 직무집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같은 내용으로 2~3회 이상 계속 반복해 제출되는 민원과 제기된 민원이 성취될 때까지 3회 이상 계속되는 민원으로 현재의 제도나 지침에 따라 해결이 곤란한 민원’으로 규정했다. 국민권익위는 단순과격형(생계형), 트집잡기형(싸움닭형), 전문가형(독불장군형), 옹고집형(막무가내형), 지능형(용의주도형), 물량공세형(한풀이형), 저격수형(어둠 속 스나이퍼형) 등 7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억지민원의 특징을 보면 ▲적법한 처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지속·반복적으로 동일·유사한 민원 제기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 ▲업무담당자에게 욕설·폭력·기물파손 등 직·간접적으로 위법·부당한 비이성적 내용 요구 ▲여러 차례 정상적인 직무집행 방해 ▲기관장을 찾아가 담당자 징계를 요구하거나 고소·고발 등의 형사처분, 손해배상 요구 ▲상급행정기관을 방문해 집요하게 행정기관에 자신의 민원을 해결해 주도록 떼를 쓰는 경우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미성숙한 시민의식
“목소리 높이고 우기고 떼쓰면 웬만하면 들어줍니다.”
악성 민원인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 했던가. 내가 주장하는 것은 권리 행사이고 남이 주장하는 권리는 감정노동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이러한 악성 민원은 행정력 낭비를 초래한다. 이는 질 높은 행정 서비스나 안정된 업무 처리를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대부분의 일반 민원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악성 민원은 민간 부문에서도 ‘블랙컨슈머’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관공서의 경우 민원 창구가 매우 다양하다. 관련 민원이 제기될 경우 해당 공무원들이 인사 평가 등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무턱대고 목소리부터 높이는 민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권력의 중심이 관에서 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성숙하지 못한 시민 의식이 반영된 탓으로 풀이된다.
민원실에 5년간 근무했다는 김 모 씨는 “내 가족, 이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며 “감정노동자도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소비자들은 소비자 개인의 부당한 요구가 다른 소비자에게 피해가 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악성 민원 대부분은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시민들의 의식 변화와 적극적 협조가 없다면 ‘불치’라는 걱정도 들린다. 결국 참다 못한 정부나 관공서들이 악성 민원에 대해 삼진아웃제, 통화 녹음 등 적극 대응에 나서는 추세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공무원이 사법기관에 호소해도 민원인은 경범죄 처벌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악성 민원인들은 더욱 활개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 공무원은 “민원인들이 국민의 상식적 수준을 넘어 불법적 또는 비이성적 행위로 공무원들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강력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며 “이러한 과도한 자기 이익에 대한 주장은 공공 이익의 기준에서 봤을 때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제도 개선 이뤄져야
억지 민원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민원사무 처리 관련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행 ‘민원 사무처리에 관한 법률’을 보면 행정기관 공무원이 민원인에게 해야 할 의무는 당연시되고 있는 반면 악성 민원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3회 이상 이유 없이 같은 민원을 제기할 경우 기관장 결재로 민원을 종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전부인데 악성 민원은 방문·전화·협박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절차상 민원을 종결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정도가 심한 악성 민원인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분풀이식 억지 민원에 휘둘리는 동안 다른 민원인이 행정 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사실상 ‘업무방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고, 민원인에게 ‘억지 민원’은 엄연히 불법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합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의견이다.
특히 억지 민원 담당 공무원 ‘개인’에게만 짊어지게 하지 말고 기관 차원에서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행정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갈등 관리 기구를 구성해 민원인의 고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단하고 중앙정부나 관계 부처에 제도개선 방안을 건의하는 등의 대처로 민원인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시각에서다. 특히 억지 민원의 양면성을 먼저 들여다 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억지 민원은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무작정 피하기보다는 ‘왜 억지 민원이 발생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관계자는 “사실은 억지에 가까운 민원도 자세히 살펴보면 미비한 법과 제도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민원처리가 안 되는 이유를 검토해 중앙정부에 제도개선을 건의하는 등 민원인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 뒤“억지 민원인을 적절히 차단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은 법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면 능동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억지 민원은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법 등 제도를 마련해 주든지, 처벌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줘야 한다”며 “미국 같은 경우는 악성 민원인이 나타나면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경찰을 부르기까지 한다”고 귀띔했다. 이어 “지금은 민원인이 행정서비스에 얼마나 만족하는가를 평가하는 데만 치중해 있고, 악성 민원에 대한 진단은 부족한 것 같다”고 일침했다.
억지 민원으로 고충을 겪고 있는 행정기관이나 민간 기업 등에 대해 전문가들은 ‘속으로만 앓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관계자는 “억지 민원인은 업무방해, 공무집행방해, 명예훼손, 모욕, 무고 등 형사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충분하고, 민사적으로도 접근금지 신청이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공익을 위한 형사적 고소라면 민원인을 고소하더라도 손가락질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러면서 “법적 대응을 꺼리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직접 송사를 진행하고 수사기관, 법정에 출석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 경우 해당 기관에서 각종 법률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훈수했다.
서지원 기자 jiwon401@ggilbo.com
|
홈으로
> 참여마당 > 자유게시판
내 가족 내 이웃
홈페이지: -
조회 : 349
의견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