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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울시의 실·국장들은 “공직생활 이후 요즘처럼 CEO의 책임을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없었다”고 토로한다. 최근 서울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철밥통 깨기’ 인사 실험 때문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능력하고 태만한 공무원 퇴출 방침을 밝히면서 그 실무작업을 실·국장들에게 맡긴 것이다. 4월 중 실시되는 정기 인사를 앞두고 실·국장들은 인원의 3%씩이 포함된 전출 대상자 명단을 지난 15일 제출했다.
외환위기 당시에도 서울시청 공무원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졌지만, 지금은 그때와 여건이 다르다. 당시는 민간과 공공분야 가릴 것 없이 구조조정이 대세였다. 정년퇴직이 임박한 공무원, 부부가 맞벌이하는 공무원들이 감원 대상으로 주로 선정됐었다. 지금의 퇴출 기준은 무능력이나 태만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실·국장들이 도맡고 있다.
선정 기준 싸고 공정성 시비
‘게으름과 나태함이 해당 직원 개인의 불이익을 넘어 부서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고, 조직 전체의 생산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직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오 시장은 지난 13일 서울시 전체 직원에게 보낸 e-메일에서 퇴출 대상이 조직에 끼치는 해악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표현은 단호했다. 오 시장에게 그들은 ‘공무원 신분 보장이라는 제도의 그늘에 안주하면서 동료 직원들의 수고로운 성취에 무임승차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피와 땀을 좀먹고 있는 극소수의 부적격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를 거부한다면 퇴출시키는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핵심은 선정 방법이었다. 서울시의 방침은 ‘실·국·사업별로 현원의 3% 범위 내에서 실·국장이 전체 부서장(과장급 이상)의 의견을 수렴해 선정하라’는 것이었다.
서울시공무원노동조합 등 공무원 단체의 반발은 거셌다. 임승룡 서울시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일은 잘하지만 인맥 관리를 잘 못하는 대다수 성실한 공무원에게 직접적 피해가 발생한다”며 3% 의무 선정 자체를 반대했다. 노조가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부분은 무엇보다도 ‘선정 기준’이다. 실·국장들이 공정하게 선정할 것이라는 서울시 시각과 실·국장들의 자의성을 의심하는 노조의 견해가 정면으로 부닥친 것이다.
노조는 실·국장들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일부 정치적 성향을 갖는 고위 공무원에게 부당한 지시를 받고 하위직 공무원들이 굴복한 적이 있어 국민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했다’며 ‘고위 공무원 책임론’을 펼치고 있다.
공은 이제 실·국장에게로 넘어갔다. 실·국장들은 직원들로부터는 ‘평가자로서의 공정성’을, 오 시장에게서는 ‘퇴출을 추진하는 강한 리더십’을 동시에 시험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 산하 도로사업소의 소장(4급) 두 명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했다. ‘3% 선정’ 과정에서 직원들 대상으로 ‘부적격자’를 적어내는 투표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투표를 한 지 각각 하루 이틀 만에 전격적으로 직위해제됐다.
“부적격자가 누군지 다 안다”
서울시 권영규 행정국장은 “부적격자 선정을 투표에 부친 것은 간부로서의 책임을 회피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실·국장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질문을 받은 실·국장들은 “조직 내에서 게으르고 무능한 직원이 누구인지는 전체 직원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무능력과 태만한 공무원을 선정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기준을 떠나 부적격자가 누구인지는 조직 내의 사람들이 다 안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실·국장들은 직원들과 살을 부딪치며 일하는 과장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과장들은 이에 앞서 실무 팀장들과 회의를 했다. 그리고 300명에 육박하는 부적격자 명단이 포함된 전출 대상자 명단이 15일 제출됐다.
명단 제출에 앞서 과장들은 이들에게 ‘선정’ 사실을 통보했다.
“마음이 아프죠. 이런 명단을 만들어본 게 처음이니까요. 그래도 당사자가 ‘예상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익명을 요구한 한 과장은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도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 사무실에서는 부적격 공무원으로 선정된 당사자가 사무 집기를 집어던지며 반발했다. 이들은 ‘왜 내가 선정됐느냐’고 억울해 하며 ‘객관적인 기준을 대라’고 따져 묻기도 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은 애당초부터 있을 수 없었다.
퇴출 과정 전반을 총괄하는 서울시 인사담당 과장은 “그동안 근무평정은 연공서열 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게 사실”이라며 “조직에 누가 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시청 내에서 인재가 많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진 실·국의 책임자들은 그나마 좀 편안한 입장이다. 인사·행정·경영·감사 관련 실·국이 대표적으로 공무원들이 전입을 선호하는 곳들이다.
이들 실·국의 한 간부는 “우리 실·국의 하위 3%라 하더라도 다른 실·국에 가면 능력과 성실도 면에서 최소 중간 이상”이라며 “명단에 포함된 우리 실·국 직원들은 그다지 억울해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첫 실험 성공할지 주목
이번에 3%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여타 전보 희망자 등과 함께 섞여 두 차례에 걸쳐 타 실·국으로부터 ‘전입 러브콜’을 받게 된다. 한 번도 러브콜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소명해야 한다. 소명에 성공하지 못하면 주차단속 업무 등을 하는 ‘현장시정추진단’에 배치받는다.
이번 서울시 인사 실험의 의미는 본인 희망과 관계없이 인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공직사회에 사실상 처음으로 도입됐다는 점이다. 공직사회의 인사 관행은 민간과는 아주 다르다. 본인이 전출을 희망하거나, 또는 실·국별 근무 연한이 꽉 차 의무적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사 대상이 되지 않는다.
특별한 규정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봐주는 온정주의 관행 때문이었다. 본인 희망과 무관하게 조직 내 필요에 따라 인사가 이뤄지는 민간과 크게 다른 점이다.
“직원 본인이 희망하지 않으면 그 직원을 다른 실·국으로 옮기게 하는 게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런 선례도 많지 않고요. 굳이 직원들과 원수가 될 필요가 없었잖아요.” (서울시의 어느 국장)
그동안 무능하고 태만한 공무원들은 어떻게 자리를 유지해왔을까. 시청 공무원들에 따르면 이들은 일단 근무 연한이 꽉 찰 때까지는 붙박이로 한 부서에 머물렀다. 근무 연한이 차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실·국으로 옮겨야 했는데, 어지간한 실·국장들은 ‘오겠다’ 하는 사람을 굳이 마다하지 않고 받아줬다 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실·국을 옮겨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연공서열 위주의 평가’ 덕에 승진 때가 되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온정주의는 공직 사회의 보편적인 현실이었다.
4월 초 명단이 발표되는 이번 전보 인사에서는 어느 해보다도 ‘인사 청탁’이 횡행할 개연성이 높다. 인사 대상이 된 공무원들이 구명활동을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부적격자로 선정된 공무원들이 다른 실·국으로부터 전입 러브콜을 받으면 인사 혁신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오 시장은 “실·국장들로서는 자기가 먼저 사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온정주의 차원에서 부적격자를 구제해 주는 실·국장들은 봐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서울시 실·국장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3월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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