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찬호.조한필] 충남 천안시 A계장(47.6급 주사)은 요즘 시청이 아닌 독서실로 '출근'한다.
부서장 양해로 오는 29일 치러지는 5급 사무관 승진시험 준비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2배수로 뽑힌 다른 승진대상자 7명과 업무가 아닌 공부 실력을 겨뤄야 한다.
행정자치부가 지난해부터 지방자치단체에 사무관 승진자 절반 이상을 반드시 시험을 통해 뽑도록 해 빚어진 일이다. 이 때문에 일선 행정의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 전국 시.군.구청 일부 계장들이 자리를 비운채 시험 공부에 매달려 있다.
◆ "계장님은 출장중"=천안시 응시자 대부분은 시청과 가까운 거리의 중앙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다. 중요 결제와 긴급 민원이 발생했을 때는 즉시 업무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멀리 가진 못한다. 이런 '독서실 출근'은 3월 초 시험대상자가 선정된 후부터 계속됐다.
민원인이 이들 계장을 찾으면 십중팔구 "출장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같은 부서 직원은 "어디로 출장갔냐"고 물으면 "직접 통화하라"고 둘러댄다.
아예 연가를 내 집이나 학원에서 공부하기도 한다.
강원도청 B씨는 지난주부터 학원서 공부하기 위해 연가를 냈다. 부서장은 그를 돕기위해 연가가 끝난 후는 출장 처리할 계획이다.
공부할 시간을 주기위해 '한직(閑職)' 으로 발령내주기도 한다. 지난해 천안시는 시험 두달 전 응시자 2명을 업무량이 적은 도서관.사적관리소로 보냈다.
◆ "이 나이에 웬 시험공부"=응시자가 공부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승진대상인원의 2~3배 수로 뽑힌 이들에게 동료는 곧 경쟁자다. 서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같은 독서실.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응시자인 C씨는 "웃사람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테니 출근하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해 지난달 초부터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다"면서 "일선 행정만 맡아오다 행정학.헌법 책을 보니 난감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선배 수험생'까지 시달린다(?). 지난해 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천안시 D과장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후배 수험생들로부터 "공부는 어떻게 했느냐. 어떤 책이 좋으냐. 문제는 어떻게 나오냐" 등을 묻는 전화가 쇄도한다. 40대 후반 나이에 모두들 어찌 공부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사정이 낫다. 맡는 일이 많아 속타는 사람도 있다. 강원도청 E씨는 "나는 일때문에 꼼짝 못한다"면서 "어떻게 공정하게 경쟁하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 지방사무관 승진 의무시험제=행자부가 지난해 자치단체장의 인사전횡 및 부조리를 막는다며 '공무원임용령'을 개정,전원 심사 승진이 불가능하도록 했다.
그러자 지자체들이 발끈했다.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지난해 1월 "국가직과 형평성에 어긋난다"면서 234개 기초단체장 서명을 받는 등 지금까지 총 10차례 행자부에 개선 건의안을 제출했다.
최근 대구시 8개 구청장들은 사무관 승진 시험을 전면 거부하기로 걸의하기도 했다.
충북대 강형기 교수(행정학)는 "일선 행정에선 '공부하는 공무원'보다 '일하는 공무원'이 절실하다"면서 "주민들 만나며 사업 벌이는 대신 사무실에 파묻혀 책보는 공무원만 만들 생각이냐"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험 승진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다. 단체장 민선시대 이후 사무관 승진(심사)과 관련해 단체장의 수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군산시장은 사무관 승진자 5명으로부터 모두 1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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