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의 어느 구에서는 호남 출신 구청장이 영남 출신 구청장으로 바뀌면서 청에서 사용하는 표준어가 달라졌다고 한다. 구청장의 출신 지역이 바뀌면서 전임 구청장 시절 자랑스럽게 쓰던 전라도 사투리가 사라지고 경상도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표준어가 됐다는 것이다. 지역 색이 옅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출신 공무원들은 눈치만 살피며 줄서기를 할 수밖에 없다.
2002년 민선 자치단체장 3기가 출범할 때에는 서울시 자치구 공직 사회가 한동안 크게 흔들렸다. 서울 시장과 22개 구청장을 차지한 모 정당 소속 단체장들이 인사 교류라는 명분으로 유례없는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기 때문.
특히 일부 구청에서는 특정 직급의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전출 동의서를 받아 이 중 일부를 전출시켰다. 이미 전출 대상자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전출 동의서를 받아 표면적으로 전출자가 인사 이동에 동의한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서울시청 등 지방행정기관에서만 31년 동안 일한 공무원이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수필집 ‘공무원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출간해 화제다. 주인공은 정순영 서울시청 산업국 DMC 사업관리팀장. 1974년 9급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그는 이 책을 통해 지방자치 공직 문화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가 꼽는 지방행정의 가장 큰 문제는 지역주의와 정치 역학 관계, 지연, 학연 등에 좌우되는 지방공직자 인사제도다. 그는 “지방자치단체장이 새로 오면 단체장의 출신 지역에 따라 지방행정의 틀이 바뀌는 저급한 행태가 1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며 “단체장이 자기 사람을 챙기는 고질적 병리 현상이 끊이질 않는다”고 비난했다. 지방 자치에 지역 감정이 개입되면서 결국 지방 자치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어서 그는 “전후의 폐허에서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것도 정통 직업 공무원들의 헌신과 봉사 때문이다”며 선거를 통해 인기몰이를 하는 정치 관료에 그들이 휘둘리지 말아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정부 내에 바둑이나 프로골프를 관장하는 부처가 있어서 사사건건 간섭했다면 이창호나 박세리 같은 세계적 인물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며 “요즘처럼 국민들의 수준이 월등하게 높아진 상황에서 공무원들이 개별 기업에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꼬집었다. 그는 “우리말에 ‘죽어 산다’는 말처럼, 공무원은 이제 평소 없는 듯 하다가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제 몫 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 제목도 ‘공무원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정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봉사와 희생 정신은 기본이고 프로 근성이 있는 공무원들이 공직을 수행해야 한다”며 “장애인 복지 전문가, 의전 전문가 등 전문적인 공무원을 양성하고 이들에게 전문 수당을 지급하거나 경력 점수에 전문가 점수를 가산하는 등의 방법으로 우대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모순된 지방 행정 시스템에 쓴소리를 하기 위한 것이지만 공무원을 지나치게 안 좋게 보는 국민들에게 공직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기 위한 점도 있다.
그는 “우리 국민들은 공무원 하면 대개 철밥통을 낀 생산성 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서울시도 과거 임명직 시장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대한 예로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시스템 개편을 들었다. “추진력 있는 민선 시장이 오면서 과거 임명직 시장들이 생각도 못했던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게 그가 말하는 서울 시정의 발전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처럼 국민 앞에서 군림할 수도 없고 신분상의 특권은커녕 오히려 더 사회적 제약을 받는 게 공무원이다”며 “심사숙고 후 진로를 정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제 불황으로 젊은이들이 자신의 적성을 고려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현상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기도 한 것.
다음은 그와 일문일답
ⓒ미디어다음 정재윤
‘공무원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 제목의 의미와 집필 이유는
제목이 과격하다고들 하는데 ‘죽어야’란 의미는 문자적인 죽음이 아니라 ‘죽어지낸다, 죽어산다, 없는 것처럼 죽어지낸다’는 뜻이다. 공무원이 모든 일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관료는 권위적이었고 일제시대에는 강압적이었다. 군사정권 하에서 관료들은 획일적 통제를 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국민을 믿어야 할 때다. 정부나 공무원들이 사회 모든 분야에 간섭하는 것은 잘못됐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자율성이 보장 돼야 경제 발전이 된다. 이런 생각들을 동료와 상사,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어서 책을 썼다.
책을 쓴 후 주변의 반응은
부정적 반응은 없다. 속이 후련하다고들 한다. 기업인들이 특히 그렇다. 공무원들도 대다수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제목과는 달리 오히려 공무원을 두둔하는 대목이 많은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비난도 많다. 특히 지방공무원들의 왜곡된 인사 문제를 비판했다. 나 역시 단체장이 바뀔 때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다. 지방자치가 중앙 정부의 재정 유치 등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지방 공무원들의 입지를 좁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 주민들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도 자치단체장이 바뀌면 단체장과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기관으로 전출 당하는 것이 그 사례다.
예전에 한 구청에서는 명목상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전출시키기 위해 한 직급 모두에게 전출 동의서를 강요했다. 하지만 전출자는 이미 선정된 뒤였다. 전출 당한 사람이 행정심판을 냈고 법원은 불이익 당한 공무원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승소해도 원상 회복이 안 되는 게 공무원 사회다. 그 사람은 이후 계속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
우리나라의 공직자에 대한 전반적 생각은
일본이 전후 경제 강국으로 떠오른 것은 정권에 상관없이 직업공무원들의 입지가 안정됐기 때문이다. 직업 공무원제를 철저히 따르기 때문에 총리가 바뀌어도 공무원은 바뀌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실무공무원은 업무의 영속성과 지속성을 보장 받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법이나 제도는 직업공무원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런저런 제약이 많다. 국민들은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공무원들이 공직을 많이 떠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디어다음 정재윤
서울광장의 잔디밭에 대해 좋지 않게 평한 이유는
잔디 광장에 대해 나쁘게 본 것은 아니다. 서울 광장은 이한열 열사 때 수많은 인파가 모였던 곳이고 여의도 광장 역시 기독교 부흥사인 빌그레험이 명설교를 했던 곳이다. 이렇듯 많은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잔디를 깔았고 이에 그런 것이 불가능해져 아쉽다는 뜻이다. 호불호의 판단은 아니다. 단지 통일 이후까지 생각해 7000만 겨레가 모일 수 있는 역사적인 광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공직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서울 시정은 문제없이 돌아가나
조심스러워서 얘기 하기 힘들다. 그런데 과거 임명직 시장들이 생각도 못했던 사업들 잘 추진되고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청계천 복원이나 대중 교통 시스템 변경이 대표적 성공 사례다. 다른 나라 대도시에서도 배우고 있다. 서울 시정에 대해서는 불만 없다.
문제는 지방 자치다. 정부가 기본적으로 국민 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골프나 바둑에 대해 정부가 사사건건 참견했으면 이창호나 박세리 같은 세계적인 스타가 육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꼭 필요한 부분에서만 강화되고 다른 면에서는 축소돼야 한다. 특히 경제 분야의 개입이 지나치다.
책에서 기자들에 대해서 쓴소리를 많이 했다. 그 이유는
자기 신문 구독 부수 늘리려고 구청에 강매해서 주민들에게 배포해 달라고 하기도 하고 특정 자치단체장의 편을 들기도 한다. 심지어 광고를 강요하기도 한다. 지역지가 지역 발전에 동반자적 인식을 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이들이 지방 자치를 퇴보시킨다.
일반인들은 공무원에 대해 아직도 인식이 좋지 않다. 이에 대한 생각은
일반인들은 왜 계속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긍정적인 활동 상황이 보도가 안 됐을 뿐이다.
삼성전자와 지방행정기관 공무원들이 교환했을 때 삼성 직원들이 공무원들에 대해 ‘일에 대한 열의와 애정이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동의하나
관청은 공익을 위해 존재하고 기업은 사익을 위해 존재한다. 단순한 척도로 성과를 판단할 수 없다. 건설 공정이 어느정도 진행됐느냐는 개량이 가능하지만 행정은 그렇지 않다. 문화를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성격으로 평가하면 무리가 따른다.
공직 희망자들에게 해줄 말은
경제가 장기간 어려우니까 공직을 많이 선호하는데 그 전에 공직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보고 사명감을 키워야 한다. 9급 공직자의 본봉이 62만원가량이다. 공직의 현실을 잘 알고 들어왔으면 한다. 과거처럼 뇌물을 받거나 부수입을 챙기는 일이 공직 사회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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